성수청과 국무당 – 잊혀진 국가 제례의 집행자들
아리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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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22:04

『성수청과 국무당 – 잊혀진 국가 제례의 집행자들』
― 조선왕조실록과 역사 자료로 본 무교의 제도화 흔적
조선 시대, 왕실의 안위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비밀스러운 국가 기관이 있었다.
그 이름은 성수청(星宿廳)이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 기관은, 조선 전기까지 존재하며 왕실과 조정의
기은(祈恩) 제례를 집행했던 국가 무속 기관이었다.
이 기관의 존재는 《성종실록》 성종 8년(1477년) 9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사간원에서 “성수청은 무당의 집단이며 조정 안에 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상소를 올리자, 성종은 “성수청은 내가 새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조종조(祖宗朝)부터 있었던 것”이라며 존속을 허락했다(《성종실록》 성종 8년 9월 12일자).
이로 보아 성수청은 이미 조선 건국 이전부터의 제도적 전통을 계승한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수(星宿)’란 한자는 천상의 별자리를 뜻하며, 도교적 세계관에서는 신령이 머무는 좌표로 여겨진다.
성수청은 바로 이 하늘의 기운과 왕실의 길흉을 연결하는 천신 제의 기관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수청’ 항목).
특히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병환이나 국난, 가뭄과 같은 재앙이 있을 때 국가 차원의 기우제와 재액 해소 굿이 자주 열렸고, 이때마다 성수청 소속 무당들이 제관으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국가 제의에 참여한 무당들은 ‘궁무당’, 혹은 국가 소속의 무당이라는 뜻으로 ‘국무당(國巫堂)’이라 불렸다.
그들은 단지 민간의 굿을 하던 존재가 아니라, 조정에서 의례에 참여하고 왕실의 안위를 점치던 공식 직능자였다.
이들 중 일부는 민간에서 영적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에 발탁되어 ‘수종 무당(隨從巫堂)’으로 활동했으며, 국가가 직접 관리하거나 신분을 보장해주는 경우도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무’ 항목).
이들 국무당은 다양한 의례와 기능에 따라 전문화되어 있었다.
예를들어, 병을 치유하는 무당은 ‘무의(巫醫)’,
귀신을 몰아내고 액운을 막는 무당은 비방무,
음악과 춤으로 신을 맞이하는 무당은 예능형 제관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구조는 무속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제도적 분업 체계를 가진 직능군이었음을 보여준다(우리역사넷, ‘조선시대 무속의례’).
조선 전기까지는 이러한 국가 무속이 유교적 통치 이념과 병존했다.
그러나 중종반정(1506) 이후, 성리학 중심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도교와 무속은 미신으로 규정되었고, 성수청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된다.
실제로 성수청은 소격서(昭格署)와 함께 비판 대상이 되었고, 중종 초기에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중종실록》 중종 1년 10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럼에도 무속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 제도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굿, 산신제, 고사, 혼례, 상례 등의 의례를 통해 무당들의 역할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도 일부 무당은 치유 능력과 기도로 명성을 얻었고, 한의사나 의녀와 함께 환자를 돌보는 일도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 문헌들에는 무당이 무업(巫業)에 대한 세금인 '무업세(巫業稅)'를 납부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이 세금은 신분과 기능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국무당은 9근, 일반 무당은 1근, 신당을 지키는 무당은 2근을 부과받았다고 전해진다(한국무속신앙사전 참고).
이는 무업이 사회적으로 일정한 경제 단위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근거이다.
또한, 국가에 효험을 보인 일부 무당은 ‘궁대신(宮大神)’으로 신격화되어 지방에서 인신(人神)으로 모셔졌으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성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기리고 있다(한국민속대백과, ‘성수청’).
이처럼 성수청과 국무당은 단순한 미신 집단이 아닌, 조선왕조 초기까지 실존한 국가 공식 의례 집행자 집단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무속이 단순한 민간 풍속이 아닌, 제도화된 민족종교 무교(巫敎)의 정체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일본이 고유 신앙인 신토(신도神道)를 정교일치 체계로 지켜낸 것처럼,
우리도 무속을 ‘무속’이라 폄하하기보다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무교(巫敎)’로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 첫걸음은 잊힌 국가 무속 기관인 성수청(星宿廳)과 국무당(國巫堂)의 실체를 바로 알고, 그 역사적 위상을 되찾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성수청 대표 전이표 巫峰 씀.
참고자료
《성종실록》 성종 8년 9월 12일자
《중종실록》 중종 1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수청」, 「국무」
우리역사넷: 「조선시대 무속의례」
한국무속신앙사전: 「국무당」, 「무업세」
― 조선왕조실록과 역사 자료로 본 무교의 제도화 흔적
조선 시대, 왕실의 안위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비밀스러운 국가 기관이 있었다.
그 이름은 성수청(星宿廳)이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 기관은, 조선 전기까지 존재하며 왕실과 조정의
기은(祈恩) 제례를 집행했던 국가 무속 기관이었다.
이 기관의 존재는 《성종실록》 성종 8년(1477년) 9월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사간원에서 “성수청은 무당의 집단이며 조정 안에 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상소를 올리자, 성종은 “성수청은 내가 새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조종조(祖宗朝)부터 있었던 것”이라며 존속을 허락했다(《성종실록》 성종 8년 9월 12일자).
이로 보아 성수청은 이미 조선 건국 이전부터의 제도적 전통을 계승한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수(星宿)’란 한자는 천상의 별자리를 뜻하며, 도교적 세계관에서는 신령이 머무는 좌표로 여겨진다.
성수청은 바로 이 하늘의 기운과 왕실의 길흉을 연결하는 천신 제의 기관이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수청’ 항목).
특히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병환이나 국난, 가뭄과 같은 재앙이 있을 때 국가 차원의 기우제와 재액 해소 굿이 자주 열렸고, 이때마다 성수청 소속 무당들이 제관으로 동원되었다.
이러한 국가 제의에 참여한 무당들은 ‘궁무당’, 혹은 국가 소속의 무당이라는 뜻으로 ‘국무당(國巫堂)’이라 불렸다.
그들은 단지 민간의 굿을 하던 존재가 아니라, 조정에서 의례에 참여하고 왕실의 안위를 점치던 공식 직능자였다.
이들 중 일부는 민간에서 영적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에 발탁되어 ‘수종 무당(隨從巫堂)’으로 활동했으며, 국가가 직접 관리하거나 신분을 보장해주는 경우도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무’ 항목).
이들 국무당은 다양한 의례와 기능에 따라 전문화되어 있었다.
예를들어, 병을 치유하는 무당은 ‘무의(巫醫)’,
귀신을 몰아내고 액운을 막는 무당은 비방무,
음악과 춤으로 신을 맞이하는 무당은 예능형 제관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구조는 무속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제도적 분업 체계를 가진 직능군이었음을 보여준다(우리역사넷, ‘조선시대 무속의례’).
조선 전기까지는 이러한 국가 무속이 유교적 통치 이념과 병존했다.
그러나 중종반정(1506) 이후, 성리학 중심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도교와 무속은 미신으로 규정되었고, 성수청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된다.
실제로 성수청은 소격서(昭格署)와 함께 비판 대상이 되었고, 중종 초기에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중종실록》 중종 1년 10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럼에도 무속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 제도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굿, 산신제, 고사, 혼례, 상례 등의 의례를 통해 무당들의 역할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도 일부 무당은 치유 능력과 기도로 명성을 얻었고, 한의사나 의녀와 함께 환자를 돌보는 일도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 문헌들에는 무당이 무업(巫業)에 대한 세금인 '무업세(巫業稅)'를 납부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이 세금은 신분과 기능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국무당은 9근, 일반 무당은 1근, 신당을 지키는 무당은 2근을 부과받았다고 전해진다(한국무속신앙사전 참고).
이는 무업이 사회적으로 일정한 경제 단위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근거이다.
또한, 국가에 효험을 보인 일부 무당은 ‘궁대신(宮大神)’으로 신격화되어 지방에서 인신(人神)으로 모셔졌으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성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기리고 있다(한국민속대백과, ‘성수청’).
이처럼 성수청과 국무당은 단순한 미신 집단이 아닌, 조선왕조 초기까지 실존한 국가 공식 의례 집행자 집단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무속이 단순한 민간 풍속이 아닌, 제도화된 민족종교 무교(巫敎)의 정체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일본이 고유 신앙인 신토(신도神道)를 정교일치 체계로 지켜낸 것처럼,
우리도 무속을 ‘무속’이라 폄하하기보다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무교(巫敎)’로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 첫걸음은 잊힌 국가 무속 기관인 성수청(星宿廳)과 국무당(國巫堂)의 실체를 바로 알고, 그 역사적 위상을 되찾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성수청 대표 전이표 巫峰 씀.
참고자료
《성종실록》 성종 8년 9월 12일자
《중종실록》 중종 1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수청」, 「국무」
우리역사넷: 「조선시대 무속의례」
한국무속신앙사전: 「국무당」, 「무업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