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과 샤머니즘(2)편

샤먼과 샤머니즘(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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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과 샤머니즘(2)편

애초의 굿은,
많지 않았던 巫들을 통해,
천지산천의 신명께 나라의 안위와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올리는 제천행사였던 것이죠.

비록 일반적인 강신무가 되었어도,
사회적으로 권력에 줄이 없으면,
귀신쒸움 정도로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에,
巫의 숫자는 제한적이었던거죠.

점차 제사의례가 정형화되면서,
巫의 굿은 도교의 초재醮齋나 유•불교 제사의식에 밀리게 되었죠.

이에, 왕족•귀족의 개인사에 巫의 굿은 필요악으로 자리하게 되면서,
돈 있는 일반인들도 길흉을 점칠수 있었지만,
일반백성들에겐 책력이 없던 시대이기에,

개인적 조상제사가 없던 시대이나,
무판의 시장성이 확대되는 시기가 된 것이죠.

책력이 보급되면서 시장성이 확대되는데,
제사날을 알게 된 백성들도 양반흉내를 내며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무판을 기웃거려 개인 길흉사를 巫들을 통해 해결코자 했기에,

巫들은 도태되지 않고,
그 숫자가 양산되기 시작된 것이죠.

고려말 이규보는 ~휫바람 소리로 백성을 혹세무민한다~는 '노무'라는 시를 남기죠.

조선말 '봉성문여鳳城文餘'는,
~조정에서 무당을 성 안에 살지 못하게 하니,

무당이 모두 노강鷺江 남쪽(노량진)에 모여들어 춤추고 둥당거리니, 그들을 의지하기 좋아하는 자가 줄을 이어 찾아들고, 붉은 가마 푸른 옷이 끊임없이 발길을 이어, 길에 꼬리를 물고 있다~고 기술하지요.

어쨌거나, 숭불의 고려에 들어,
佛은 저변의 巫를 끌어들이려 巫•佛을 융합시키매,

진오기가 천도제로 바꿈된 것이니, 무당의 숫자나, 굿을 할수 있는 장소가 많았을 것이겠죠.

일제 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조선의 무당이 3천여명 정도였다고 하지요.

고려말 정도전이 공양왕에게 상소하길~
무당에서의 일은 번거롭고 어지럽다~하며,

불교의 법석法席과 도교의 초재醮齋도 비하하였는데, 무당은 무를 지칭함이 아니고,
무들이 굿을 하는 장소를 말한 것이죠.

이에,
이씨조선 건국의 주역인 사대부들이 유교를 정치철학을 삼게되면서,
유교 이외는 '음사난적'이 된 것이죠.

이에,
도심의 사찰이 산으로 쫒겨나고 폐쇄되고,
그나마 배운 것은 있으나 갈곳 없는 스님들이,

특별한 직업없이 점•굿(노래•춤)을 하는 巫들과 호구지책으로 어울렸지요.

스님이 '거사'로 불리게 되는 거사패들이 전국을 방랑하며 굿판을 벌려 호구지책했던 것이죠.

이 과정에 정착한 巫들로 마을농악이 성행하고,
거사패에서 소위 사당패 등이 생겨나고,
현대에 들어 유랑악극단을 발전하는게지요.

[샤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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